기 · CHAPTER 03
제도의 역사와 남겨진 질문
한국 형법은 1953년 제정 이후 국가의 형벌권에 피해자의 의사를 반영하는 제도를 유지해 왔습니다.
한국 형법은 1953년 제정 이후 국가의 형벌권에 피해자의 의사를 반영하는 제도를 유지해 왔습니다. 반의사불벌* 구조는 폭행·협박 등 일정한 범죄에 마련되었고, 이후 특별법에도 서로 다른 목적과 범위로 규정되었습니다. 모든 조항이 동일한 이유로 도입된 것은 아닙니다.
제도를 옹호하는 쪽은 사생활 보호, 경미한 분쟁의 해결, 피해회복과 관계 회복, 형사절차의 부담 완화를 이유로 듭니다. 입법자가 실제로 어떤 이유를 댔는지는 그 법의 제정안과 심사보고서에 남아 있습니다.
오늘의 쟁점은 그 논리가 반복적 폭력이나 권력 불균형에도 적합한가에 있습니다. 한 번의 다툼을 조정하는 모델은 장기간의 협박과 경제적 통제에 적용될 때 다르게 작동할 수 있습니다. 동일한 처벌불원서*라도 자유롭게 작성한 것인지, 위험에서 살아남기 위해 작성한 것인지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스토킹처벌법*의 변화는 제도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례입니다. 2021년 시행된 법에 있던 반의사불벌 규정은 2023년에 폐지되었습니다. 특정 범죄에서 피해자 의사에 부여한 법적 효과를 사회가 다시 평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한국 형사가 처음부터 모두 친고죄*였던 것도 아니고, 이런 제도가 한국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외국에도 고소* 요건, 절차 중단, 화해와 피해회복을 고려하는 제도가 있습니다. 이름을 비교하기보다, 피해자의 의사가 국가의 판단을 어디까지 구속*하는지를 봐야 합니다.
연표로 펼치면 흐름이 잡힙니다. 1953년 형법 제정 때 폭행·협박 등 일정 범죄에 반의사불벌 구조가 마련되었습니다. 이후 산업화와 함께 노동·교통·지식재산 등 특별법 영역으로 비슷한 소추*조건이 번져 나갔습니다. 모든 조항이 같은 이유로 도입된 것은 아닙니다. 사생활 보호가 목적인 조항도 있고, 경미한 분쟁의 조기 해결이 목적인 조항도 있으며, 피해회복을 유도하려는 조항도 있습니다. 입법자가 실제로 어떤 이유를 댔는지는 각 법의 제정안과 심사보고서에 남아 있으니, 옹호 논리를 원용할 때는 그 법의 기록을 확인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전환점은 스토킹처벌법입니다. 2021년 시행된 법에는 반의사불벌 규정이 있었으나, 반복 접근의 특성상 서명을 매개로 한 접촉 유인이 문제 되었고 2023년 개정으로 폐지되었습니다. 2023년 7월 11일부터 피해자의 처벌불원과 무관하게 처벌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 번 만든 제도를 사회가 다시 평가해 고칠 수 있다는 사례입니다. 다만 폐지가 곧 안전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신고 여건, 법 적용 범위, 집행과 보호조치가 함께 가야 효과가 납니다.
이 역사가 가정폭력* 개혁에 주는 교훈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범죄의 특성에 맞춘 개별 검토가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스토킹과 가정폭력은 반복성과 관계 내 압박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구성요건과 보호체계가 다르므로, 같은 문장을 복사해 붙일 수 없습니다. 둘째, 폐지와 보호를 함께 설계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소추 제한을 없애는 일과 피해자를 지키는 일은 같은 개혁의 양쪽 바퀴입니다. 어느 하나만 돌리면 제자리에서 맴돕니다.
피해자 의사 구조를 다시 짠 또 하나의 사례로 친족상도례를 덧붙입니다. 형법 제328조 제1항은 일정한 친족 사이의 재산범죄에 대해 일률적으로 형을 면제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2024년 6월 27일 이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친족 관계만 있으면 범죄의 중대성, 피해 규모, 실제 유대, 피해자 의사를 묻지 않고 면제하는 것은 형사피해자의 재판절차진술권을 침해한다는 이유입니다. 미성년자·장애인 등 취약한 가족 구성원에 대한 경제적 착취를 용인할 우려도 지적했습니다.
다만 헌재는 친족상도례의 취지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위헌성은 '일률적 면제'에 있으므로, 피해자의 처벌 의사표시를 소추조건으로 하는 등 여러 입법 선택이 가능하다고 밝혔습니다. 2025년 12월 31일을 시한으로 개선입법을 주문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반의사불벌과 친고죄, 형면제라는 서로 다른 옷을 놓고 피해자 의사를 어디에 둘 것인지 묻는 논의라는 점에서 이 책의 주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국가가 손을 놓는 구조를 다시 짜는 흐름은 재산범죄에서도 진행 중입니다.
그때와 지금을 가르는 것은 국가의 주머니 사정입니다. 형법이 제정된 1953년은 전쟁 직후였습니다. 수사할 경찰도, 기소*할 검사도, 가둘 교도소도, 피해자를 도울 예산도 부족한 나라에서 국가가 모든 형사사건에 적극 개입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경미한 분쟁은 피해자의 의사에 맡기고 국가는 뒤로 물러서는 구조가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국가 개입을 자중하는 사상이 법전을 지배한 데에는 철학만이 아니라 가난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조건이 다릅니다. 수사·기소·재판 인프라가 갖춰졌고, 범죄피해자 지원과 임금 대지급금, 보호시설과 긴급 주거지원 같은 제도가 있습니다. 돈을 쓰면 개입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반의사불벌 조항이 붙은 상당수 범죄를 들여다보면 임금체불*, 가정폭력, 스토킹처럼 국가의 노동감독 의무와 보호 의무가 겹치는 영역입니다. 이런 사건을 사적 해결에 맡기는 것은 국가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일이 됩니다. 서명 한 장으로 사건을 닫는 관행이 가난한 시절의 유산이라면, 부유해진 지금은 그 유산을 걷어낼 때입니다.
다만 돈이 있다고 모든 개입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생활 보호와 과잉형벌의 경계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바뀌어야 할 것은 개입의 유무가 아니라 개입의 방식입니다. 처벌만 앞세우는 개입이 아니라 증거와 위험을 판단하고 주거·생계·치료를 연결하는 개입, 피해자의 서명을 받아내는 개입이 아니라 피해자의 조건을 만드는 개입입니다. 이 책이 폐지와 지원을 한 묶음으로 말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 장의 한 문장: 제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가 다시 평가해 고칠 수 있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