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 CHAPTER 01
피해자의 의사는 언제 자유로운가
반의사불벌죄를 둘러싼 문제는 피해자의 의견을 존중할 것인가에서 시작합니다.
반의사불벌죄*를 둘러싼 문제는 피해자의 의견을 존중할 것인가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가정폭력*이나 임금체불*처럼 상대방이 생활비와 일자리를 좌우하는 관계에서는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 어떤 상황에서 나왔는지도 물어야 합니다. 용서, 두려움, 경제적 의존, 자녀에 대한 걱정은 같은 서류에 담길 수 있지만 같은 의미는 아닙니다.
피해자에게 사건을 끝낼 권한을 주는 제도는 관계 회복과 조기 피해회복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가해자가 그 서명을 얻기 위해 접근하거나 지급 약속을 이용할 유인도 만듭니다. 이 책은 그 양면성을 다루고, 국가가 피해자의 안전과 생활을 책임지도록 제도를 바꾸는 방안을 제시합니다.
나는 약 2013년, 임금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노동관서에 처벌불원서*를 제출했고 이후 사업주가 지급에 응하지 않았다고 기억합니다. 사건기록으로 확인한 사실은 아닙니다. 사업주 이름, 사업장, 금액과 서류의 문구는 적지 않습니다.
가정폭력에 대한 문제의식도 같은 질문으로 연결됩니다. 누군가 사망한 뒤 책임을 묻는 대응에 머무르지 않으려면, 위험한 관계에서 벗어나도 살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해야 합니다. 피해자의 뜻을 듣는 일과 국가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넘기는 일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의 주장은 반의사불벌 규정을 줄이거나 없애는 일과, 안전·주거·생계 지원을 함께 설계하자는 것입니다. 범죄마다 위험과 제도의 목적이 다르므로 폐지 여부도 달라집니다. 규정을 없앤다고 해서 모든 사건이 자동으로 기소*되거나 유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유롭다는 말을 판단할 때는 서명이 아니라 서명에 이르는 과정을 봅니다. 같은 처벌불원서라도 빚을 갚겠다는 약속을 믿고 쓴 것인지, 아이를 데려가겠다는 말을 듣고 쓴 것인지, 맞을 것이 두려워 쓴 것인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서류 한 장에는 도장만 남고, 그 앞의 대화와 압박은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사와 재판에서는 누가,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서류를 썼는지, 쓴 뒤 실제 지급이나 약속 이행이 있었는지를 따로 확인합니다.
강압의 형태도 다양합니다. 때리겠다는 직접적 위협만 강압이 아닙니다. 생활비를 끊겠다는 말, 직장에 알리겠다는 말, 자녀를 데려가겠다는 말, 쫓아내겠다는 말도 피해자의 선택을 좁힙니다. 경제적 의존이 클수록 말 한마디의 무게가 커집니다. 월급이 나오지 않는 노동자에게 '서명하면 돈을 주겠다'는 말은 제안이면서 동시에 압박입니다. 가정에서 생활비를 쥐고 있는 상대방의 '용서해 달라'는 말도 사과이면서 동시에 요구일 수 있습니다. 같은 말을 건넨 사람의 지위와 피해자의 처지에 따라 달리 읽어야 합니다.
피해자에게 사건을 끝낼 권한을 주는 제도의 취지는 존중할 만합니다. 경미한 다툼을 법정까지 끌고 가지 않고, 피해자가 원하는 회복을 빨리 얻으며, 가해자와 관계를 정리할 길을 여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과와 배상을 받고 일상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피해자도 있습니다. 제도의 문제는 이 취지가 아니라, 취지가 작동하는 조건입니다. 상대방과 대등하게 협상할 수 있고, 서명을 거부해도 생계와 안전이 유지되며, 약속이 깨졌을 때 되돌릴 길이 있을 때 처벌불원은 자유로운 의사가 됩니다. 그 조건이 없는 곳에서 같은 서류는 자유의 증명이 아니라 의존의 기록이 됩니다.
따라서 물을 질문은 '서명했는가'가 아니라 '거부할 수 있었는가'입니다. 서명을 거부했을 때 피해자에게 남은 선택지가 무엇이었는지, 약속 이행을 확인할 장치가 있었는지, 철회와 번복의 길이 열려 있었는지를 봅니다.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으면 서류만으로 의사를 단정할 수 없습니다. 국가가 피해자의 뜻을 존중한다는 것은 서류를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라, 자유로운 뜻이 나올 조건을 만드는 일입니다. 이 책이 안전·주거·생계를 함께 말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 장의 한 문장: 서명이 아니라 거부할 수 있었는지를 묻는 것이 자유로운 의사를 확인하는 길입니다.
